어머니가 영어를 잊으셨습니다

— 이민 가정의 치매, 미리 알아야 할 것들

어머니가 영어를 잊으셨습니다. 40년을 캐나다에서 사셨는데, 어느 날부터 간병인의 말을 못 알아들으십니다. 이민 가정에만 생기는 일이고, 미리 알면 준비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민 1세대에게만 있는 문제

치매는 최근 기억부터 흐려집니다. 가까운 일을 잊고 먼 과거로 돌아갑니다. 나중에 배운 것이 먼저 흐려지는 경향도 있습니다.

이민자에게 나중에 배운 것은 영어입니다. 스무 살 넘어 배운 영어보다 어릴 때 배운 한국어가 더 깊은 곳에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어만 남는 경우가 생깁니다.

여기서 분명히 해 둘 것이 있습니다. 모든 분에게 이런 일이 생기지는 않습니다. 간병인과 가족의 보고는 많지만, 연구 결과는 엇갈립니다. 모국어가 더 잘 보존된다는 연구가 있는 한편, 두 언어가 함께 나빠진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어떤 연구에서는 영어를 오래 쓴 환경일수록 영어가 더 남았습니다.

다만 UCLA 연구진이 51명의 이중언어 환자를 관찰한 보고에서는, 모든 간병인이 환자가 모국어를 더 선호하고 영어 대화가 줄었다고 답했습니다. 영어로 말하다가 모국어 단어가 섞여 들어오는 경우가 가장 흔했습니다.

요컨대 반드시 생기는 일은 아니지만,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준비하는 것과 모르고 당하는 것은 다릅니다.

이게 왜 큰 문제인가

캐나다의 요양 시설과 방문 간병 서비스는 영어로 돌아갑니다. 환자가 영어를 못 하게 되면 이런 일이 생깁니다.

  • 아프다는 말, 춥다는 말, 화장실 가고 싶다는 말을 전하지 못합니다
  • 간병인은 환자가 비협조적이거나 공격적이라고 판단합니다
  • 환자는 자기 집에서도 말이 통하지 않아 고립됩니다
  • 한국어를 못 하는 손주와는 대화가 완전히 끊깁니다

말이 통하지 않아 생기는 행동을 병 자체의 증상으로 오해하면, 필요 없는 약이 늘어날 수도 있습니다.

미리 챙겨 둘 것

부모님이 아직 두 언어로 소통하실 때 해 두면 좋은 일들입니다.

  • 중요한 결정을 지금 문서로 남기세요. 위임장(Power of Attorney), 의료 결정 대리인, 연명 치료에 대한 뜻. 말씀이 어려워진 뒤에는 법적 효력을 갖추기가 까다로워집니다.
  • 한국어가 되는 가정의를 찾아 두세요. 진단과 치료가 길게 이어지는 병입니다. 통역을 거쳐 매번 설명하는 것과 직접 말이 통하는 것은 차이가 큽니다.
  • 한국어 간병 인력을 알아보세요. 비용과 대기 기간이 있으므로 필요해진 뒤에 찾으면 늦습니다.
  • 기본 문장을 적어 두세요. “아파요”, “추워요”, “화장실”, “물 주세요” 같은 표현을 한국어와 영어, 발음까지 적은 카드를 만들어 두면 간병인이 바뀌어도 쓸 수 있습니다.
  • 좋아하시던 것을 기록해 두세요. 즐겨 듣던 노래, 고향, 젊을 때 하신 일. 기억이 흐려진 뒤에도 이런 것들이 안정에 도움이 됩니다.

이런 신호가 보이면

나이 들어 깜빡하는 것과 치매는 다릅니다. 아래와 같은 변화가 이어지면 병원에서 확인해 보시는 것이 좋습니다.

  • 같은 이야기를 짧은 간격으로 반복하십니다
  • 늘 다니던 길을 헷갈려 하십니다
  • 약 드시는 것을 자꾸 잊거나 중복해서 드십니다
  • 돈 계산이나 청구서 처리가 어려워지셨습니다
  • 성격이나 판단이 눈에 띄게 달라지셨습니다
  • 영어로 말씀하실 때 한국어 단어가 자꾸 섞입니다

마지막 항목은 이민 가정에서 놓치기 쉽습니다. 가족끼리는 원래 섞어 쓰니까요. 하지만 예전에는 영어로 잘 하시던 상황에서 갑자기 어려워하신다면 눈여겨보셔야 합니다.

이 글로 진단할 수는 없습니다. 위 증상은 갑상선 문제, 우울증, 약물 부작용, 비타민 결핍처럼 치료 가능한 다른 원인으로도 나타납니다. 그래서 더욱 검사가 필요합니다.

어디서 시작하나

온타리오에서는 가정의(Family Doctor)에게 먼저 가는 것이 출발점입니다. 가정의가 기본 검사를 하고 필요하면 전문의나 기억력 클리닉으로 보냅니다.

진료 예약을 잡으실 때 몇 가지 준비하시면 좋습니다.

  • 언제부터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날짜와 함께 적어 가세요. 의사 앞에서는 기억이 잘 안 납니다
  • 드시는 약과 영양제를 전부 챙겨 가세요
  • 가능하면 가족이 함께 가세요. 본인은 변화를 잘 느끼지 못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 한국어 통역이 필요하면 예약할 때 미리 요청하세요

도움받을 수 있는 곳

  • 알츠하이머 소사이어티 (Alzheimer Society) — 캐나다와 온타리오 지부가 있고, 지역별 사무소에서 가족 교육과 상담을 제공합니다. 1983년부터 활동해 온 기관입니다.
  • 211 온타리오 — 무료 전화 안내 서비스입니다. 지역의 돌봄, 복지, 보건 서비스를 연결해 줍니다.
  • 호주 치매협회 한국어 자료 — 치매란 무엇인지, 의사소통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재정과 법률은 어떻게 준비하는지를 한국어 PDF로 정리해 두었습니다. 호주 기준으로 쓰였지만 병에 대한 설명과 돌봄 방법은 그대로 참고하실 수 있습니다.

토론토 한인 사회에 한국어 치매 가족 모임이 있는지는 이 글을 쓰는 시점에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혹시 알고 계신 곳이 있으면 CBESTN 궁금해요 게시판에 알려 주세요. 같은 일을 겪고 계신 분들께 큰 도움이 됩니다.

돌보는 사람도 환자입니다

치매 돌봄은 몇 년, 길면 십 년이 넘게 이어집니다. 혼자 감당하면 돌보는 사람이 먼저 무너집니다.

  • 형제자매끼리 역할을 나누세요. 멀리 사는 형제도 할 일이 있습니다
  • 잠시 맡아 주는 서비스(Respite Care)를 알아보세요. 쉬는 것은 포기가 아닙니다
  • 같은 처지의 가족 모임에 나가 보세요. 설명하지 않아도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 본인의 건강 검진을 미루지 마세요

이 글은 일반 정보 제공을 위한 것이며 의학적 조언이 아닙니다. 증상이 염려되시면 반드시 가정의나 전문의와 상담하세요. 여기 적은 기관과 서비스의 운영 내용은 바뀔 수 있으니 이용 전에 직접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CBESTN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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